오브제와 정체성(Object and Identity) by sjoonk

오브제와 정체성?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아주 낯익은 단어가 아닐까요. 맞습니다. 객체 지향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마주치는 단어가 바로 이 객체(object)와 식별(identity) 같은 단어들이니까요. 그런데 왜 '객체'니 '식별'이니 하는 편한 말 놔두고 '오브제'니 '정체성'이니 하는 고상한 말을 썼냐구요?


맞습니다. 컨텍스트(context)를 좀 전환하려구요. "오브제와 정체성"은 요즘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창 전시 중인 미국 미술전의 소주제 중 두 번째 주제의 제목입니다. 지난 달부터 가보고 싶었던 전시회 였는데 그간 장마 비를 핑계삼아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오전에야 보러 갔다지요. 미국 휘트니미술관의 작품들을 옮겨 온 것이라니, 아마 휘트니 미술관에 가 보신 분들이라면 별 흥미를 못 느낄 것도 같습니다.


사실 미술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현대 미술은 높은 장벽 그 자체입니다. 가끔 미술관을 찾긴 하지만 추상(abstraction) 수준이 너무 높다 보니 봐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고 모르니 감흥도 없고 재미도 못느끼는 악순환의 연속. 마치 LISP 같다고나 할까요. ㅋㅋ


전시실 벽에는 이번 전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 마르셀 뒤상이 반(反)예술을 기치로 오브제object를 미술 속에 던져넣은 이후 
미술가들은 오브제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



오브제? 반예술? 멋진 마케팅 문구입니다.



'오브제' 하면 그래도 안드로이드폰에서 돌아가는 증강현실 앱이라도 떠오르긴 하건만, 반예술은 또 뭐람?? 이런 무식한 생각으로 전시실들을 차례차례 둘러 봅니다. 다행히 몇몇 작품들은 예전에 다른 전시에서도 만난 적이 있는 낯익은 작품들이로군요 (아, 물론. 낯이 익다는 말이지 이해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ㅎㅎ). 제1전시실을 지나 제2전시실, 제3전시실, 그리고 특별전까지. 총 네 곳의 전시실을 돌아 다시 제 발길이 머문 곳은 바로 제2전시실 "오브제와 정체성" 이었습니다.


전시실 문을 들어서면 먼저 마리솔의 작품 <여인과 강아지>(1964)가 반갑게 관람객들을 반깁니다(사진). 이 작품 속 중간에 있는 여인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고 강아지는 작가가 자신의 애견을 박제하여 붙혔다고 하는군요. 프레드 토마셀리의 작품 <오코틸로 야상곡>(1993) 도 제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라색 바탕에 불꽃놀이를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알록달록한 알약들을 소재로 사용하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기 전엔 깜쪽 같습니다. 찰스레이의 작품 <퍼즐병>(1995) 속에는 청바지에 안경을 쓴 미국 남자가 투명한 유리 병속에 들어가 서 있고, 프랭크 무어의 <자장가 II>(1997) 는 눈녹는 북극의 모습을 하얀 침대와 연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가는 문이 있는 한 쪽 벽에는 이 전시 포스터에 등장하는 바로 그 <부드러운 비올라(Soft Viola)>가 걸려 있습니다.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반 브뤼겐이 2002년에 제작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누렇고 큰 비올라 몸통이 마치 녹아내리기라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제 조금 이해가 갈 듯도 합니다. 전시에 오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읽은 한 블로그에서 개념미술이라고 했던 말 말입니다.



" 개념미술은 작품의 원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뒤샹의 원래 변기가 없어져도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개념 때문입니다. 즉, 개념미술은 작품 형식의 기교나 아름다움으로부터 예술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나 과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반(反) 미술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



창의성이 중요하고 아이디어가 높이 평가되는 세상은 비단 기술 분야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작품의 철학, 작품 속에 흐르는 작가의 아이디어를 읽으라는 말이었군요. 추상이 외려 사실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예술가의 그 아이디어와 철학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겠구요. 시각으로 느끼는 게 아닌 생각에 공감하는 예술. 그런 의미로 보자면 지금 전세계에서 스타트업(start-up) 들이 보여주고 있는 갖가지 기술혁신도 다 예술의 한 모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 못 가보신 분이라면 한번 참관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특히 맨날맨날 컴퓨터 앞에서만 생활하는 저같은 "쟁이"에겐 컨텍스트 스위칭(context switching)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요?



덧글

  • ikspres 2011/07/26 08:58 # 삭제

    저도 context switch가 필요한데 말이죠. 덕분에 간접 context switch라도 잠시했네요. 저는 여전히 개념미술은 미술의 하나로 포함하기 싫다는 개념을 가진 고리타분한 쪽입니다만. ^^
  • sjoonk 2011/07/26 10:00 #

    Ikspres님은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전 사실 뭐가 뭔지도 몰라서. 심지어는 웹 개발도 미술(예술)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ㅎㅎ context switch되었다니감사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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