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Daum DNA lens에서 '정부의 역할' 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트를 읽었습니다. 정부는 하나의 운영체제이며 플랫폼이니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동감입니다. 정부는 운영체제이며, 또한 그러기에 정부는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플랫폼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그냥 평범한 보통의 국민들 대다수가 행복하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플랫폼이어야 합니다. 마치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그 속에서 실행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과 프로세스들을 적절하게 관리하여 모든 프로그램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부가 만약 효율적이라는 이유 또는 경쟁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프로그램 몇몇만 잘 돌아가게 한다면 나머지 프로그램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제법 오래 전, 공무원으로 모 경제부처에 근무할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나 스스로 "시장주의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정부의 역할은 기업들이 기업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북돋워주고 지원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만든 기획안을 보면서 내 직속상사이신 과장님 - 지금은 정부 모 부처의 수장으로 계시는 - 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규제야. 정부는 어떤 현상의 부작용과 역기능을 먼저 생각하고, 그 역기능을 막는 부분에 주력해야 돼."

그 때 그분의 말씀이 저에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게 그 시간 이후로 제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어떤 정책을 만들고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기준점 내지는 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후 저는 공직을 그만두고 나와 기업체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작은 벤처기업을 창업하여 CEO를 한 적도 있었고, 크고 작은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와 기업 또는 공무원과 기업가의 차이를 나름대로 분명히 단정지을 수 있는 저만의 개똥철학 같은 게 생겼는데, 바로 정부는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보고(또는 보아야 하고), 기업가는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업가는 지금 당장 어떤 일이 어렵더라도 그 속에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그 가능성을 불씨삼아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내고 그 일을 이루려고 매진합니다. 반면 정부는 다릅니다. 그리고 달라야 합니다. 정부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들,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예외적인 상황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제는 그 대상입니다. 정부는 규제를 하는 곳이고 또한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에 대한 규제냐 하는 것이겠죠. 무엇에 대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그 속에 바로 정부의 철학이 들어있고 또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녹아 있습니다. 그 규제는 '시장 자유'를 위한 규제일 수도 있고, 또는 특정 산업이나 몇몇 기업의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규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자유'와 '산업 활동'에 초점을 맞춰 정부가 가는 길을 정하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생기는데, 바로 정부와 기업의 일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모호해 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정부가 하나의 기업체처럼 되게 되고, 정부의 기관장들이 마치 한 기업의 CEO인양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좋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 세대에 정부는 그런 역할을 했었죠. 마치 하나의 커다란 복합체처럼, 정부가 주도하여 기업활동을 이끌고 나라를 하나의 기업처럼 몰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건 정부의 역할이 아니며, 되어서도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부는 지원을 하거나 장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그 본연의 기능인 규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규제는 반드시 불평등의 해소와 상대적으로 평등의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정부가 존재하고 공무원이 월급을 받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 읽은 폴 크루그먼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제게 많은 보탬을 줍니다. 번역서의 제목은 "미래를 말하다"이지만, 실은 원서의 제목인 "The Conscience of a Liberal(어느 진보주의자의 양심?)"이 더 잘 어울렸을 법한 책입니다.
극심한 불평등은 우리를 하나의 사회로 묶어주는 결속력을 약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인들의 정부 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1960년대 미국인 대부분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는 명제에 동의했다. 지금은 대부분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1960년대 미국인 대부분은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을 위해' 국정을 운영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불평등의 확대가 우리 사회에 냉소주의가 만연해진 이유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냉소주의는 미국을 점점 더 중남미 국가처럼 만든다. 정치학자 에릭 우슬러너와 미첼 브라운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양극에 위치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다. ... 사회적 믿음은 경제적 평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그리고 폭넓은 자료를 통해 이를 입증했다).
by thinkr | 2008/07/07 13:46 | 트랙백(1) | 덧글(0)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잃어버린 낙원
스스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의 나이가 된 이들이라면 누구든 아련히 떠오르는 향수같은 추억이 있을 것이다. 꼭 여럿이 어울리는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혼자 길을 걸으며 '그 때가 좋았어'라며 읊조리거나 '그때로 돌아갈수만 있다면'하고 떠올리곤 하는 시절 말이다.

모르긴 해도 그 시절의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을 터이고 또 훨씬 불편한 생활을 했을 것임에 분명하지만, 주위엔 항상 뛰어 놀 수 있는 빈 공터나 골목길, 들판, 그리고 언제나 함께 했던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내일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될 것이라는 작지만 굳은 희망이 있었다. 물론 사람의 기억은 변한다고 하니. 그것도 많은 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들만 남기고 안좋은 기억들은 죄다 잊거나 아니면 좋은 쪽으로 바뀌어 기억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 추억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런 추억이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가 최근에 낸 저서 "미래를 말하다(원제: The Conscience of a Liberal)"란 책 역시 과거 추억에 대한 회상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나는 1953년에 태어났다. 나는 우리 세대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태어난 것에 특별히 감사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미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을 비난하고, 캄보디아 폭격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진보주의 정치를 표방하는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미국 정치와 경제 사상 찾아보기 힘든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듯하다."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달 초, 어느 일간지에 1987년의 세종로와 2008년의 세종로 모습을 비교해 놓은 사진이 실렸었다. 모르긴 해도 신문이 그 사진을 실은 이유는 아마도 세상이 변해서, 87년 민주화 항쟁 당시의 그 엄숙하고 진지하던 시위의 모습이 이제는 마치 축제처럼 변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사진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학부 시절 헌법학 원론 시간에 그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고서 읽고 외웠던, 그리고 법전 속에서나 있으려니 생각했던 바로 그 '자유'와 '평등' 말이다. 87년 그때의 우리는 '자유'라는 기치 아래 모였었다면, 2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평등'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네 세상은 자유와 평등의 변주곡이라고 했던가. 한 사회의 역사는 결국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들어나가는 자유와 평등의 변주곡이다. 마치 어느 순간 이쪽, 또 어느 순간에는 저쪽으로 왔다갔다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시계추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뻔히 알면서도 하게 되는 바보같은 질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라면, 아마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하는 것일 것이다. 똑같은 질문을 자유와 평등을 향해 던져 보는 건 어떨까?

자유와 평등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물론 답은 "It depends."일 것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니 과연 그게 제대로 된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도 싶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묻는다면 나는 분명히 답할 수 있다.

나는 평등을 택할 것이다.

왜냐고?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오래지 않은 먼 훗날, 나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듯한 구절 하나를 떠올리며 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1970년에 태어났다. 나는 우리 세대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태어난 것에 특별히 감사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을 비난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진보주의 정치를 표방하는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한국 정치와 경제 사상 찾아보기 힘든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듯하다."
by thinkr | 2008/07/06 00:23 | 트랙백 | 덧글(0)
Passenger, 이 뭐꼬?
몽그렐(mongrel) 몇 마리가 끌고 가던 레일스 프로젝트 하나를 패신저(Passenger) 로 갈아 태웠다.

쉽다. 이렇게 쉬울 수가 없다. 쉽기가 마치 PHP 같다. 이제 개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한편으론 허무하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돌고 돌아 온 셈이니 기뻐할 일이기도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것'을 이제사 했으니 그다지 뛰며 좋아할 일도 아니다.

불과 2, 3년.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루비(레일스)는 꽤나 많은 길을 걸어 왔었나 보다. CGI에서부터 출발하여 FastCGI로, 그리고 다시 mongrel로 갈아타고, 급기야는 웹서버 자체를 nginx로 바꾸는 시도까지. 그러는 사이 사이로, 정말이지 크고 작은 트릭과 방법들이 많이도 생겨나고 또 사라지기도 했었다.

그런 루비 기차가 다시 돌아와 멈춘 곳이 다름 아닌, 웹 배포 방식의 '정석 중 정석'이라고 할 아파치 모듈이라니... PHP나 파이썬 쟁고(dDjango) 같은 여느 다른 웹 도구들이 진작부터 표준으로 사용하던 바로 그 방법 말이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건 또 무얼까?

우선, 레일스를 한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배포' 문제에 쏟아 부어야 했던 것 같다. 하루가 멀다하게 새로 쏟아지는 배포 방법들은 한편으론 신기했지만, 서비스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고이 간직하던 mongrel 책들과 레일스 배포만을 주제로 하여 나온 책도 이제 책장 저 한켠으로 밀어 두어야 할 것 같다. 아쉽다.

그렇지만 얻은 것도 많다. 웹 배포와 관련해서 벼라별 기술들을 접할 수 있었던 즐거운 배움의 과정이었다. 게중에는 "아!~ 이런 방법도 있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방법들도 있었고, 그 속에서 'RACK'이라고 하는 루비 웹 애플리케이션의 표준 인터페이스도 탄생했다. 무엇보다도 레일스의 험난한(?) 배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루비/레일스 커뮤니티의 열정과 시도는 샘솟는 아이디어들만큼이나 정열적이었다.

그 열정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였고,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항상, 지금의 이 방법이 최종이고 최상이라 생각하며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오래지 않아 또 무언가 더 기발하고 더 나은 방법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루비 기차의 다음 정착역은 어딜까?
by thinkr | 2008/07/05 00:20 | 트랙백 | 덧글(1)
루비가 얼랭에 빠졌던 이유?
어제 제6회 루비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스무 명 남짓 주섬주섬 둘러앉아 서로 격없는 얘기들을 두서없이 나누던 "사용자 모임"이 어느덫 정원을 100명이라고 정해 놓고도 대기자가 50명이나 더 넘치는 어엿한 "세미나"로 변했네요. 물론 실제로 참석하신 분들은 그 보다는 조금 적었던 것 같긴 합니다만. (아마도 날씨 탓이겠죠?)

흔히 "세미나"라고 하면 누군가가 (주로 영리를 목적으로) 주최를 하고, 발표자들 역시 소정의 대가(발표료?)라도 받으면서 진행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루비 세미나는 조금 다릅니다. 순전히 루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열정' 하나만으로 어렵사리장소를 섭외하고, 뭔가 다른 루비 사용자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는 루비스트(rubyist)들이 스스로 시간을 내어 발표자료를 만들어 즐겨 발표를 합니다. 그렇다고 발표자료의 질(質)이 다른 여느 유료 세미나들에 비해 떨어지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번 세미나에서 시간을 조금 할애받아 작은 발표를 하나 하였습니다. 제목은 "루비 얼랭에 빠진 날(pt.pdf)"이었는데, 내용은 얼랭의 병행성-지향 프로그래밍(Concurrency-oriented programming) 개념을 소개하고, 레일스의 액티브리소스를 사용하여, 얼랭으로 작성된 문서기반 DB인 CouchDB와 REST로 연동하는 RADAR 아키텍처를 구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1,500분의 시간을 준비하여 15분의 시간 동안에 발표해야 하는 게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참석한 많은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것은 없을 겁니다.

가끔 모르는 분들은 왜 이렇게 세미나가 드문드문 열리냐며 투덜거리기도 합니다면, 루비 세미나처럼 이런 '자발적인' 세미나가 이렇게라도 한번 열리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노력을 하신 분들이 계시기 마련입니다. 세미나를 준비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일정을 짜고 하는 모든일들은,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아마 deepblue님과 ikspres님께서 주로 해 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두분은 "튜토리얼 세션"이라고 하는, 루비 세미나 사상 유래가 없는 새로운 시도도 맡아 해 주셨구요.) 놀라운 루비 신공을 숨긴 채 묵묵히(?) 행사 진행을 맡아 주셨던 미투데이codian님도 한국 루비 커뮤니티 발전에 큰 몫을 하고 계시죠. 화장실 가는 길에 얼핏 보니 오픈마루 명찰을 단 몇몇 분들이 사진촬영도 하고, 또 음료수와 다과도 꾸준히 사다가 채워 나르고 있었습니다.  참, 그리고 루비세미나 때마다 책을 협찬해 주시는 인사이트 출판사도 빼놓을 순 없을 겁니다. (국내에서 루비와 레일스 관련 책들을 출간하는 유일한 출판사이기도 하죠.^^) 모두들 감사드리고 또 수고 하셨습니다.

참, 루비가 얼랭에 빠졌던 이유가 궁금하다구요? 세미나 쉬는 시간에 deepblue님과 잠깐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deepblue님이 요즘 얼랭에 관심이 많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최고의 루비스트께서 왜? 라고 물었더니, 해맑은 웃음으로 이러시네요.

"재미있는 걸 어떡해요!"

미투. 그게 바로 우리가 루비에, 그리고 또 얼랭이나 다른 무언가에 끊임없이 '빠지는' 이유 아닐까요?
by thinkr | 2008/06/29 11:53 | 트랙백(1) | 덧글(0)
선희씨, 감사합니다.
오늘 출판사에서 책을 몇 권 보내 주셨습니다. 제목은 "프로그래밍 얼랭". 부끄럽지만 제가 번역한 책입니다. 이번 번역이 첫 번역은 아닙니다만, 매번 '번역'이라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할 때마다 새롭고 또한 언제나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는 점입니다. "번역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금 잊을만 하면 또 하고 싶고 또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까닭에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번역하는 내내 "꼼꼼하지 못한 사람은 번역을 하면 안된다"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섯 분의 리뷰어들(한분, 두분, 세분, 네분, 다섯분)께서 마치 무예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처럼 어설픈 초벌 번역을 꼼꼼히 검토해 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실은 고민고민 끝에 정한 단어를 두고 용어가 틀렸다고 말할 때는 많이 섭섭하기도 했고 또 더러는 조금 자존심 상하는 지적들도 없진 않았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더 많은 분들이 더 많은 회초리를 주셨더라면 아마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원서를 더 오래 붙들고 더 오래 고치고 더 많이 다듬었다면 아마 더 훌륭한 번역서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역자의 역량이 뒷받침될 때 얘기겠죠. 이미 20년도 더 전에 얼랭 언어를 만들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개념을 발전시켜 온 저자의 내공을 불과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에 고스란히 따라가서 원서에 나오는 행간의 의미까지 아우를 수 있는 번역서를 내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일 겁니다. 오히려 번역이 반역이란 소리나마 듣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작은 위안을 삼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는게 당연하겠죠.

번역을 하다 보면, 사실은 작업 기간 내내 가장 신세를 많이 지게되는 분이 다름 아닌 출판사 편집자님입니다. 처음, 앞뒤 문맥도 맞지 않고 맞춤법마저 엉성한 원고를 받아서 그게 제대로 된 문장꼴이 되게 고치고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 가면서 혹시라도 있을 오역들을 찾아냅니다. 읽어서 선뜻 이해가 와닿지 않는 문장들을 빨간색 폰트로 꼼꼼히 지적하고 대안으로 더 좋은 문장을 제시해주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진대, 색인이며 페이지 맞추기, 오타교정 등등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처리해 주시니 뭐라 감사의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사실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번역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절반도 안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공은 편집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 권의 번역서에서 역자가 자유로이 얻어 쓸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 역자 서문을 달 수 있는 한 두 페이지 정도에 불과하고 그 나마도 이런 저런 얘기를 주절거리다 보면 편집자에게 올리는 감사 인사는 언제나 아무도 읽지 않는 서문의 맨 마지막 언저리 한 구석에 이름 석 자 달랑 올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시간을 내어 책을 만들어주신 편집자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한번 전해 봅니다.
by thinkr | 2008/06/12 17:17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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